정옥자 - 호수에 몸을 던진 아버지와 세 동생(뿌리깊은나무 1977년 8월호)
이런 일이 있었다
아버지는 어린 세 동생을 부둥켜 안고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자식의 목숨이 어버이의 것이라는 생각은 옳을까
초 여름의 싱그러운 풀내음이 그득한 산길이었다. 길 양 옆 풀밭에는 난초꽃 모양의 보라빛 붓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나는 이미 꺾은 한 아름의 꽃다발에 만족하지 않고 자꾸만 꽃을 좇아 이리저리 뛰어 다렸다. 그패에 나는 열다섯살짜리 계집애로 춘천 사범 병설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그때로 부터 꼭 6년 전인 1950년 7월 그러니까 육이오가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은 아버지와 여자 동생 셋의 주검을 화장하려고 청평 호수 근방에 있는 솔이라는 마을을 찾아가고 있었다. 전쟁통에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그러나 더 기막힌 일은 당신 혼자만 죽은게 아니라 큰딸인 나만 남기고 세 딸을 모두 안고 죽음의 길로 떠난 것이다. 그때에 동생들은 저마다 여섯 살, 네살, 두살이 었다. 3주검들을 난리통에 경황 없이 물가에 가매장을 하고 육년이 지나도록 다시 찾지 못했다. 우리 가족은 비만 오면 가매장한 네 사람의 주검이 물바 떠내려갈까 봐 이야기 속의 청개구리처럼 가슴을 죄었다. 그러다가 1956년에야 비로소 주위가 수습이 되고 죽은 사람들을 생각할 수가 있게 되었다. 철없던 나는 어른들의 침통함에는 아랑 곳 없이 춘천에서 부터 청평의 산골짜기까지 드리쿼터에 실려서, 때로는 소달구지에 매달려서 가는 동안에 여행 떠난 아이같이 재잘대며 들떠 있었고 산길에 접어 들자 아름답고 수려한 자연의 경치에 홀려버렸다. 어쩌면 그때의 나는 1950년 전에 아홉살짜리 계집 아이로 피난길을 떠났던 철없던 나와 별로 변함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내 고향 춘천은 삼태기 산이 라고 불리는 봉이산을 의지하고 소양강을 낀 깨끗하고 아담한 소도시이다.
내 부모님은 자식을 바라다가 늦게야 나를 얻었고 다음해에 바로 그렇게도 바라던 아들을 얻었다. 아버지의 기쁨은 이루 말찰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가 먹구름 치는 하늘에 용이 오르는데 몸체는 이미 하늘로 올라가고 꼬리만 겨우 가물가물 사라지는 태몽을 꾸고 배스리게 되었다는 내 남동생은 꿈 탓인지 돌을 채 못 넘기고 무슨 병으론지 죽고 말았다. 그리고 딸만 셋이 두해 터울로 생겨나 우리 집은 딸부자가 되었다.
요즈음은 조금 나아졌지만 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모두 아들을 참으로 끔찍이 바랐다. 더구나 우리 아버지는 생각이 깨지 못한 분이어서 아예 아들은 "쓸 자식"으로 딸은 “못쓸 자식"으로 치부했다. "못쓸 자식"만 넷이나 생겨나자 아버지의 실망은 무척이나 컸던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른들의 슬픔이나 기쁨 따위와는 관계없이 잘 자랐다. 생활도 그만하면 넉넉하였던 편이었데다가 어머니는 딸이라고 조금도 섭섭해 하시는 기색이 없이 우리들을 귀여워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설빔으로 분홍 유똥 치마와 자주색 반초장을 댄 노랑 호박단 저고리를 쌍둥이들같이 해 입혔다. 진분흥의 차롬한 유똥 치마를 입고 으스대며 뛰어 놀았던 기억 이 지금도 생생하다. 육이오 사변이 나던 해에 나는 국민학교 3학년이었다. 학교에서 제법 느지막이 봄 학예회를 가졌었다. 나는 등나무꽃 빛깔의 치마저고리를 입고 학예회에 나가 춤을 추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 집 앞마당에 총알이 와 박혔다. 집안이 술렁거렸고 어른들은 모여 앉아 피난 대책을 의논했다.
삼팔선이 멀지 않은 춘천 사람들은 이미 늦은 시기에 피난을 시작하였다. 길에 나가면 피를 흘리는 사람들이 들것에 실려 가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가 있었다. 동생들을 데리고 겁도 없이 그 웅성거리는 북새통을 껑충거리며 돌아다녔다. 어린 우리들에게 전쟁은 다만 새롭고 놀라운 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 안처서는 친 척들이 모여서 피난 보따리를 꾸리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동생들은 어머니가 내주신 분홍치마와 노랑 저고리를 입고 나는 학예회 때에 새로 지어 입었던 보라색 치마저고리를 입고 피난길을 떠나게 되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판에 아이들에게 좋은 옷이나 입혀서 가고 싶었던 듯하다.
아버지는 서울을 거쳐서 충청남도 서산에 있는 외가에 까지 가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차를 타고도 몇 시간씩 가야 하는 외가엘 걸어서가야 한다니 기가 막혔다. 네살짜리와 두살짜리 동생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업었고 여섯살짜리 동생과 아홉살짜리인 나는 걸었다. 나는 맞이 체면에 별로 힘든 기색을 않고 걸었지만 여섯살짜리 동생은 조금 걷다간 업혀서 가겠다고 울며 버티었다. 돈 가방과 패물만을 챙겨 들고 먹을 것이며 옷과 그릇 나부랑이는 친척들에게 맡긴 형편이니 여섯 살 아이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쉬엄쉬엄 갈 수 있는 형편도 못 되었다. 총 소리와 포소리는 우리를 앞질러 가는 것 같았다. 하루에 이삼십 리쯤씩 걸었을 게다. 며칠 뒤에 청평 에 닿았다.
피난길의 그 아름답던 경치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요즈음도 강물을 끼고 온갖 꽃이 피어 있는 오솔길을 따라 걷는 꿈을 가끔 꾸곤 한다. 됫 날 자라서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읽고 그때에 본 동네 가운데에 하나가 바로 그와 같은 곳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우리들이 청경 호수가의 작은 마을인 솔이에 닿았을 때는 초여름의 이슬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었다. 우리가 묵기로 미리 약속해 놓은 공회 당 뜰엔 금잔화가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우리 가족들을 이끌고 온 아버지는 공회당에 피난 보따리를 부려 놓자마자 "이미 서울도 점령되었다니 큰일이야. 서산은커녕 서울도 못 가서 붙들리고 말 텐데 이 일을 어떡하지" 하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리고는 한참 만에 다시 "이곳에서 하룻밤 푹 쉬어서 내일 아침에는 배를 타고 춘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게 좋겠어. 죽든지 살든지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고 말했다. 사람들은 모 두들 맥없이 공회당 마루에 널브러져 누워 있었다. 아무도 아버지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튼 우리는 그날 그곳에서 정말 오랜만에 아늑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아버지가 마련해 오신 닭을 잡아서 포식을 했다. 우리는 아무도 몰랐지만 그 푸짐한 저녁밥이 아버지와 동생들에게는 최후의 만찬이었던 셈이다. 가늘게 부리던 이슬비도 그치고 이튿날은 맑게 개었다. 비에 씻긴 산은 진한 연두빛 물감을 마구 으깨 떠 놓은 듯이 보였다. 청평 호수의 투명한 물위에는 하늘이 그대로 내려와 담겨 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이었다. 아버지가 전세 낸 패 큰 거룻배에 우리 가족은 물론이려니와 함께 온 친척들과 우리와 뜻을 같이 하는 다른 피난민들이 몇 사람 더 탔다. 우리가 탄 배는 우선 청평 호수의 한 가운데로 나아가서 북쪽으로 진로를 잡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평소에 별로 술을 즐기지 않던 아버지가 어디서 구해 구했던지 보따리 하나에서 네홉들이가 됨직한 소주병을 꺼내었다. 그리고 첫잔을 뱃사공에게 건네 준 다음에 한 잔씩 한 잔씩 따라서 혼자 마셨다. 병 이 바닥나도록 마시고 거나해진 아버지는 그 때에 돌도 채 안되었던 막내 동생을 안아 보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우리들이 딸인 것을 늘 섭섭해 했고 그 때문에 별로 귀여워하지도 않았었다. 그러던 아버지가 동생을 안아 보겠다니 어린 내 마음에도 기뼜다.
“엄마, 아빠가 애기 안아 보시겠대"하면서 나는 어머니가 안고 있는 아기를 안아다가 아버지에게 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네살짜리와 여 섯살짜리도 "아빠! 나두, 아빠 ! 나두" 하며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아버지는 심각한 얼굴로 "그래, 둘 안자, 셋 안자"하면서 동생들을 안아 올렸다. 나는 다 컸다는 긍지를 갖고 그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고 어머니는 젖은 기저귀를 강물에 헹구고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오랜 여독에서 풀려난 느긋한 기분으로 멀리 사라 져 가는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고 앉았거나 뱃바닥에 비스듬히 누워서 졸았다. 얼핏 보기에 전쟁 같은 것은 일어나지도 않은 것 같았다. 다만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며 평화롭게 뱃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공은 유유히 노를 저었다. 바로 그때에 아버지의 몸이 기우뚱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그 일을 맨 처음 본 나는 죽을 듯 이 소리치며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가 돌아다보았을 땐 이미 "풍덩"소리와 함께 내 동생들의 분홍치마 자락이 나풀하며 아버지의 모습과 더불어 푸른 호수 속으로 사라지고 난 뒤였다. 모든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졌다. 배에 탄 사람들은 넋을 잃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실감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사태를 맨 먼저 깨달은 어머니는 미친 듯이 나를 잡아끌고 호수로 뛰어들려고 했다. 나는 안간힘을 다 써서 어머니의 겨드랑이 밑으로 빠져나오면서"난 죽기 싫어, 무서워, 무서워" 하면서 소리치고 울었다. 그러는 사이에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어머니를 붙들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곧 기절해 버렸다. 사공은 술에 취해 물에 뛰어들 엄두도 못 내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그 깊은 물속으로 뛰어들 형편이 못 되었는지 보고만 있었다. 나는 기절한 어머니 곁에서 악을 쓰고 울었다. 슬퍼서가 아니라 그냥 무섭고 떨려서 울었다. 아버지는 동생들을 참으로 꼭 껴안았던 모양이었다. 한번 나풀거린 분홍치마는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어린것들이 살려고 한번쯤 곤두박질을 해 봄직도 한데 수면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잠잠했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밟고 있던 뱃바닥에 명함 한 장이 놓여 있는 것을 주웠다. "쓸모없고 철없는 어린 것들은 먼저 데리고 갈 터이니 남은 재산을 정리하여 큰 애나 잘 길러 주오"라는 내용 이 담긴 이른바 유서였다. 그 글은 간밤에 미리 써 두었던 것 같았다. 사공은 그곳이 청평 호수 의 한 가운데이고 깊이가 스물네 길이나 된다고 하였다. 배를 타자고 한 사람도 아버지고 배가 호수 한가운데까지 가거든 북쪽으로 방향을 잡자고 한 사람도 아버지였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의 자살 계획은 완벽했던 샘이다. 그 일이 있은 뒤부터 중년 아낙네가 된 지금까지 나는 아버지의 죽음의 동기를 끊임없이 생각해 보았다. 사회가 불안정할 때는 언제나 그렇듯이 그때도 두숭숭한 소문이 많이 떠돌았다. 그 중에는 인민군이 남자를 보기만 하면 손바닥부터 뒤집어보고 손에 못이 박히지 않은 사람은 모조리 총살시킨다는 소문도 있었다. 손이 고운 사람은 일하지 않고 노동자를 수탈만 했기 때문 에 그런다는 것이다. 또 들리는 말로는 우리가 가던 길은 좁은 길이었기 때문에 인민군과 만나 지 않았지 큰길은 모두 인민군이 점령하였다고 했다. 게다가 서울은 말할 것도 없고 천안 그 아래까지 인민군이 쳐내러 가고 있으니 이미 승부는 판가름이 난 셈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외가인 서산으로 가는 길은 이미 막혔고 춘천으로 돌아가자니 그네들이 말하듯이 노동자를 착취한 이른바 유산 계급이었던 아버지는 스스로 총살감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더구나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할 처지에서 "쓸모 없는" 계집애들만 주르르 늘어섰으니 대쪽같이 휠 줄 모르는 고지식한 양반이 죽음의 유혹을 떨쳐 버리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진정한 이유를 누가 가늠할 수 있을까?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살아남은 사람만이 형벌처럼 몇 십 년 동안이나 그 일을 두고 되풀이 생각해 볼 뿐이다.
우리는 배를 호숫가에 대고 어느 오두막에 머물며 시체 찾기에 나섰다. 혼절했던 어머니는 그날 밤에 정신이 들자 나를 흔들어 깨웠다. 영문을 모르고 일어난 나를 어머니는 냅다 호수가로 잡아끌었다. 잠결에 끌려가던 나는 문득 어머니의 뜻을 알아채고는 "엄마가 죽으러 가요! 엄마가 강가로 가요! " 하며 소리 소리쳐서 잠든 친척들을 깨우고는 엉엉 울었다. 달은 휘 영청 유난히 밝은데 흰 옷의 엄마는 꼭 유령 같았다. 나는 무서움에 떨면서 엄마의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고 사람들이 달려올 때까지 악을 쓰며 울었다. 그날 이후로 며칠 동안 어머니는 밤낮으로 친척들의 감시 속에서 깨어났다가는 다시 혼절하고 떠 넣은 미음을 몇 번 입에 넣고 또 의식치 없어지곤 하였다.
친척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폐물이랑 돈 가방을 털어서 일꾼들을 사서 호수를 뒤지게 했다. 호수는 깊고 넓어서 도무지 어디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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