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장군의 생거지(生居地)를 찾아서
전봉준 장군이 태어난 곳은 서해안 고속도로 변에 바로 면한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 마을로 20여 호의 조그마한 마을의 좌측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뒤로는 조산(祖山) 역할을 하는 화실봉의 높다란 산과 그 앞으로 주산(主山)이 있고 마을 뒤쪽의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지석묘군)이 자리하고 있다. 동네 앞으로는 작은개울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의 조그마한 마을로 마을 앞 전면으로는 안산(案山) 역할을 하는 작은 산과 멀리 전라남도 장성과 경계를 이루는 노령산맥의 방장산이 병풍처럼 우뚝 서 있다.
그동안 전봉준 장군의 출생지 설은 매우 분분했었다. 그러나 고창의 한 역사학자의 노력으로 천안 전씨의 족보가 공개되면서 전라북도 고창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었다. 녹두장군은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에서 1855년 12월 3일에 태어나 이곳에서 10대 초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태인 감곡면 계봉리 항새마을(現 정읍시 감곡면 계봉리)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태인 산외면 동곡리(現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로 이주해 청년기를 보내고, 다시 고부 북면 장내리(現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로 이주해 살면서 그곳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했다.
전봉준 장군의 아버지 전창혁(1827년 출생)은 몰락한 양반의 후예(殘班)로 땅이 없어 농사를 직접 경작하지는 않았고, 어디에서 살고 있더라도 주로 서당을 운영하면서 어린 학동들을 가르치는 것을 주요 생계수단으로 삼았던 듯하다. 서당의 수입이라는 것이 추수기에 1년 동안의 학비를 곡식으로 받는 것이어서 서당을 통한 수입의 규모가 작아 보조적인 생계수단으로 약방을 겸해서 운영하면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창혁은 고부에 살던 당시 고부향교의 장의(掌議)로 군(郡)에서 주요한 사항을 결정할 때 향교를 출입한 것으로 봐, 유학의 학문수준이 꽤나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창혁은 자신이 직접 전봉준을 가르치거나 후에 태인으로 이주하여서도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서당에는 꾸준히 보내 자식 교육에 많은 열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전창혁은 매우 의식 있는 향촌의 지식인으로 전봉준의 사상과 의식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판단된다.
전창혁의 이런 저항의 지식인 의식은 정작 자신의 실천을 통해 전봉준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그의 죽음이다. 전창혁의 죽음을 두고 몇 가지 설이 있는데 확실한 것은 전창혁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늑탈에 항거하여 모진 매를 맞고 그 장독으로 죽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조병갑이 구보(舊洑)를 허물고 무리하게 신보(新洑 ; 만석보)를 구축하면서 한 약속을 깨고 만석보의 수세를 거두려 하자 이에 분개한 농민들이 등소(等訴)를 하게 되는데 그 장두(狀頭)가 다름 아닌 전창혁 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 이전에 군수인 조병갑의 어머니가 죽자 고부향교에서 논의하여 부의금(賻儀金) 2천 냥을 걷자는 논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前 장의였던 전창혁이 심하게 반대한 일로 이미 조병갑에게 원한을 산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창혁의 일련의 행동을 볼 때, 그가 가지고 있던 정의감과 저항의식은 자연스럽게 전봉준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전봉준 장군의 주요한 생활터전 이었던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로 가는 길은, 두승산과 천태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고 두승산 쪽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을 건너, 조그만 언덕을 넘으면 나온다. 둔덕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분위기의 마을로, 마을 중앙에 예전부터 사용한 우물이 있고 그 우물에 바로 면하여 전봉준 장군이 30대부터 동학농민혁명 때 까지 살았던 생가가 있다.

녹두장군의 생거지를 찾아다니면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전봉준 장군이 태인(泰仁)에서 살 때이다. 태인으로 처음 이주하여 살던 계봉리 항새마을은 그의 어머니인 언양 김씨(1821년 출생) 일가가 금구의 원평 근방 마을에서 세족을 이루며 살던 곳으로, 후에 동학농민혁명의 든든한 동지이자 외가의 친척 벌 되는 김덕명 장군이 살던 곳이다. 여기에서 살던 때 전봉준은 김덕명과 깊은 인연을 맺은 것으로 보이며, 이는 훗날 최시형의 주도로 동학이 충청도 보은의 장내리에서 수운 최제우의 신원운동을 펼칠 때, 보은집회와는 별도로 금구 원평에서 이전 공주나 삼례의 신원운동의 한계를 극복해 보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좀 더 적극적인 집회를 개최함으로써, 북접과 차별화를 시도한 바탕을 이곳 원평에서 만들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이주지인 동곡리 지금실은 다름 아닌 김개남 장군이 태어나고 살고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는 막역한 사이로, 후일 김개남 장군의 중매로 전봉준 장군의 딸을 혼인시킬 정도로 가까웠다. 일설에 전봉준과 김개남의 갈등을 부각시키는 연구가 있는데, 이는 동학농민혁명 자체의 전술과 전략에 대한 몰이해와, 두 사람의 역할분담에 대한 인식부족, 그리고 청년시절 두 사람의 동고동락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전봉준장군은 23세인 1877년 4살 위인 여산 송씨와 결혼하나 곧 사별을 하고, 남평 이씨와 재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처와 사이에서 두 딸을, 후처와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봉준 장군의 생계수단도 역시 아버지 전창혁과 유사한데, 조소리와 말목장터에서 서당과 약방을 동시에 운영하면서 약간의 농토(3두락 ; 600여평)를 경작하였다. 젊은 시절 산천을 유람하면서 풍수지리도 심도 있게 공부하였고, 이러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근방에서 상(喪)을 당하는 집이 있으면 좋은 자리로 직접 묘(墓) 자리를 잡아주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역에서 경조(慶弔)가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 축하와 조의를 표 했으며, 항시 신중한 언사와 행동으로 향촌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다. 평소 이러한 지역에서의 폭 넓은 신망과 존경은 연령은 물론 향촌에서 부(富)나 계급과 관계없이 광범위한 인간관계를 가능케 하는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군이 구체제에 대해 저항정신을 가질 수밖에 없는 가장 주요한 계기를 결정하게 해주는 요인은 그 무엇보다도 생계를 유지하기에도 어려운 제반 경제 여건이었을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그것이 이미 계급과 태생이 결정해 놓은 운명이라고 체념한 듯도 하지만, 청년기에 삼남지방 방방곡곡을 유람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농민, 민중들의 생활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그런 궁핍이 결정되어진 운명이 아니고, 구조적인 문제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각각의 향촌의 체제저항의 폭 넓은 지식인들을 두루 사귀고, 각 지역의 지형여건과 인문지리여건을 충실하게 공부하였던듯하다. 아마 훗날 남접의 든든한 후원자와 동지가 되는 서장옥이나 황하일 같은 동학의 주요 지도자들도 이 과정에서 만났던 것이 아닌가 한다.
전봉준 장군의 여러 군데 생거지를 다니면서 살아온 이력을 통해 장군의 사상의 형성과정과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끝까지 남게 되는 몇몇 혁명주체 동지들과의 끈끈한 동지애와 인간관계 형성까지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19세기 조선을 둘러싸고 발생된 사건을 통해 일련의 사회, 경제, 정치, 국제관계 및 시대사상의 기조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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